감상/추천   / 글 번호 576409   
  감평 부탁드립니다.
  2 이제현[sragon]
조회 3337    추천 0   덧글 4   트랙백 0 / 2018.02.27 04:51:55

1

오늘도 늘어져서 치킨에 생맥 한 잔이란 어른스러운 사치를 즐기려는 찰나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TXF택배입니다. 수취확인 부탁드립니다.”
딱히 뭔가를 주문했다거나 한 기억은 없는데.
별 생각 없이 단말에 사인한 나는 옆에 놓인 거대한 상자를 쳐다보았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도 상자에 이진한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것으로 봐서 이 물체는 내가 주문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뭐지?”
일단 현관에서 거실까지 끌고 갔다.
뭐야 이거 엄청 무겁잖아.
택배 아저씨 이거 어떻게 들고 오신 건지.
팔에서 쉰 소리가 날 때쯤 바닥에 주저앉았다.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통스러워하다가도 커다란 가위를 가져와서 누런 박스테이프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호기심도 호기심이었다.
박스테이프를 한 커플 벗겨놓고 나자 이것이 뭔지 감이 왔다.
투명한 비닐을 너머에 안대를 쓰고 잠들어있는 소녀, 상자 옆에는 조그맣게 ‘인공소녀’라고 써져있었다.
이 인공소녀라는 제품은, 최근 십 년간 올해의 히트 상품에 빠짐없이 기록되어있는 가전제품으로, AI와 Giga maximum Wi-fi를 탑재한 로봇이었다.
삼천만 원에서 사천만 원 대 가격이지만 기능추가를 하면 칠천만 원부터 억 단위까지 자유롭게 퍼질 수 있어서 과금을 유발하는 상품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에쿠스 한 대랄까. 결코 얕볼 수 없는 가격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인공소녀에 열광하느냐하면 그것의 유용성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그 비싼 가격을 이해시키기라도 하듯, 인공소녀는 기본적으로 가정일의 전반을 도맡아 하고 아이가 있다면 훈육을, 사무원이라면 비서 일을 해주었다.
이러한 기능에 인공소녀는 맞벌이 주부들에게는 필수 상품이었으며, 굳이 맞벌이 주부가 아니더라도 예쁘장한 모습 덕분에 성인 남성들에게도 호평, 나아가 일부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권위의 상징으로 불러지는 만큼 인기 있는 건 어떻게 필연적이었다.
그래서 인공소녀의 가격은 타 상품보다 조금 세분화 되어 있었다.
가정용은 시가 삼천만 원 대의 보급용.
사무원이라면 시가 오천만 원에서 칠천만 원 사이의 다용도용.
갤러리들이나 일부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일 억 단위나 십 억 단위의 특수사양.
이게 인공소녀의 배급표라고 할 수 있다.
‘어디보자, 그렇다면 이건……’

제품 명: ARTIFICIALITY GIRL-LDGXOQP(Origin 3rd)
운영체제: Winmax 5 dow 128비트
언어: 한국어..... (외국어 다운로드 가능)
시스템 제조업체: LP-blue
시스템 모델: 845135 LP blue home connect
내장SSD: 4096GB
외장하드: 32768GB

‘3세대 특수사양…… 아버지가 힘 좀 써주셨네.’
포장지를 뜯고 누워있는 인공소녀를 앉힌 뒤 노트북을 가져왔다. 몇몇 전선을 인공소녀에게 꽂자 인공소녀는 나긋나긋한 억양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LP-blue사의 인공소녀를 구입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본 회사는 소비자의 의향에 맞춰 언제나 최선의 질과 제품을 제공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인공소녀 법 1조 2항에 따른 제품 구매자의 성명과 나이, 지문, 홍채를 인식하겠습니다. 이 정보는 결코 상업 목적으로 쓰이지 않을 것임을 명시합니다. 또한 제품 구매자께서 인공소녀를 분실 경우 구매자를 확실할 목적으로 수집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나는 의문을 갖지 않고 절차를 진행했다.
“감사합니다. 이진한 고객님, 그러면 마지막으로 당신의 인공소녀에게 이름을 붙여주십시오.”
노트북 정 중앙에 창이 하나 떠 있었다.
이미 생각해 두었던 게 있었으므로 키보드 자판을 눌렀다.
나는 내 인공소녀의 이름을 인이라고 지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공소녀의 이름을 줄인 ‘인’.
인공소녀를 줄곧 꿈꿔왔던 내겐 다른 이름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져서이다.
글자를 입력한 후 창이 꺼졌다. 다른 창이 뜨지 않는 걸로 보아 마지막 절차 같은데도 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몇 분, 혹 미동이라도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다른 절차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인은 다시 말했다.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성격 유형을 선택해 주세요.”
눈도 뜨지 않고 읊조리는 인은 무척 담담하게 말해갔다.
“성격 유형에는 천진난만한 여동생계, 순진한 소꿉친구계, 덜렁계, 데레계, 츤데레계, 진성M, 진성S, 그밖에도 누님계와 다정한 엄마계가 있습니다. 다양한 성격유형을 다운로드한 후 진한 님의 의향에 맞춰 선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 저기 설명해줄 수 있어?”
“무엇을 말이죠?”
“그러니까…… 소꿉친구계…… 라는 게 뭐야?”
“이용자 평점을 들으시겠습니까?”
질문과 다르게 나오는 대답에 황당해 하는 동안 말이 이어졌다.
“일단 성격유형 서비스 이후 연령별로 선택이 가장 많은 성격유형은 10대에서 20대 츤데례계입니다. 20대에서 40대는 누님계, 50대에서 60대는 데레계입니다. 그것과 별개로 가장 높은 평점으로는 누님계가 있으며 사유는 ‘아이를 잘 돌봐주어서’입니다. 반대로 진성S, M은 이용자가 매우 소수입니다.”
미안 더 모르겠어.
“선택하시기 어려우시다면 저희 SP기능에서 추천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들으시겠습니까?”
“으, 응. 그래.”
“845135 LP blue home connect 제품 모델 특수기능입니다. 고객님이 인공소녀와 직접 생활해가며 만들어가는 성격유형, 자신만의 색깔로 인공소녀를 물들여보세요. 인공소녀는 그런 고객님의 마음에 응답할 것입니다. ……입니다.”
어느 때와 달리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색채의 어투는 왠지 모르게 인이 죽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라디오 녹음 아니었나?’라는 생각과 별개로 아무것도 모르겠는 나는 듣기를 포기했다.
“그럼 그걸로 해줘.”
“수료했습니다. 감정 프로세서를 불러들이는 중, 진행 중 단말을 뽑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단말에서 30%…… 40%, 올라가는 퍼센트 포인트가 보였다. 그리고 그게 100%가 되었을 때, 노트북과 마찬가지로 단말기 전원이 나가며 인의 눈이 떠졌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진한 님께 배송된 제품 번호 3rd, 358번 ‘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절.
다소곳이 머리를 모으고 절을 하는 인을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선택한 맞절.
“잘 부탁해.”
누가 보면 무척 웃기지 않을까 생각한 뒤로 고개를 올려 시선을 마주쳤다.
“………….”
“저, 저기?”
“무슨 일이죠, 진한 님.”
“일단 우리 집에 대해서 소개할게.”
“………….”
“인?”
“말씀하십시오.”
무뚝뚝한 어투의 인은 계속 낯빛을 짙게 깔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로 말하자면, 낯선 나머지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일단 여기는 거실이고 부엌도 함께 있어, 네 뒤에 있는 방이 화장실이고 그 옆의 방이 침실, 아직 네 방은 가구를 안 샀으니까 오늘 시간이 되면 가구를 주문하자.”
“그러면 오늘은 진한 님과 함께 자는 건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은 엄청난 파괴력으로 귀여움을 어필했다.
충격.
잠시 말을 멈추고 관조적인 태도로 인을 쳐다보았다. 악의란 일절 없는 순수성의 덩어리, 사슴 눈망울처럼 또랑또랑 쳐다보는 인은 내 마음 한구석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거 엄청 귀엽다, 내가 말하긴 묘하지만 천사 같은 느낌, 꽉 끌어안아서 뒹굴뒹굴 둥글고 싶은 기분이다. 현실에서 그랬다간 쇠고랑 찰 것 같으니 패스, 아, 인공소녀니까 괜찮을지도.
“나 잡혀가?”
“네?”
“아냐, 잠깐 말이 헛나왔어.”
“넵.”
귀엽다. 천사.
레알 마지 정말 진심 천사.
“………….”
“………….”
그래도…… 뭐랄까, 어색했다.
오갈 말은 없고, 공통된 화제조차 없는 채 회피할 수도, 달리 꺼낼 말도 없는 인과 나는 시시각각 분위기에 삼켜지고 있었다.
“저기…… 밥 먹었어?”
“아뇨. 하지만 체내 에너지가 남아있으니 괜찮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안 먹은 거지?”
“네.”
“간단하게 뭐라도 만들어올 테니까 TV라도 보고 있어.”
“제가 하겠습니다.”
“한 번 정도는 축하한다는 의미니까 내가 할게.”
이 흥분을 죽여야한다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약간의 불만스러움을 남기며 소파에 앉는 인은 내 말대로 TV를 보고 있었다. 켜둔 것은 뉴스이니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걸 봐도 될 텐데.
요리를 하는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식빵을 구웠다. 마음속으로는 먹으면서 웃어주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무럭무럭 망상의 나래를 키우고 있을 때, 인은 곤히 자고 있었다.
ZZZZZ……
제법 곤히 자는지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어떤 표정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런 맥 빠지는 전개라니.
‘……귀여우니 됐나.’
소파에 앉아 토스트를 먹고 있던 참에 인의 머리가 떨어졌다.
툭.
어깨에 기댄 채 새근새근 자는 인은 뭔가를 먹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음냐, 음냐’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최고잖아.
속으로 쾌차를 부르면서 토스트를 보았다. 음식을 남기는 것은 보기 안 좋아서 먹으나, 먹다보면 인이 깰 것 같았다.
중대한 고민 끝에 나는 토스트를 내려놓고 인을 안아들었다.
팔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아니 현재진행형으로 진짜 부숴 질지도.
그래도 어찌어찌 침대에 눕히고 방에서 나가려고 할 때, 나는 물끄러미 인을 쳐다보았다.
로봇이라고 하지만, 정말 로봇일까 싶을 정도의 모습, 아담한 체구에 등까지 내려오는 흑발과 살갗에 닿을 때 마다 느껴지는 온기는 정말 인간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로봇으로 대할 수 없었다.
방에서 나가기 전, 인을 한 번 쓰다듬으려고 하자 인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꽉.
“인?”
“인! 일어나봐.”
“크으으읏!”
놔주지 않는 인을 흔들어서 깨웠지만, 애석하게 몸만 뒤척일 뿐 일어나진 않았다. 아니, 일어날 기미조차 없었다.
얼마나 깊이 자는 건데!
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나자 포근하게 자는 인과 내 손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천사같이 자고 있는 인.
내 팔을 살포시(?) 감싸주는 손.
같이 잔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세간의 눈이 무서워서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뭣보다 인간적으로 넘어선 안 될 일선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침통한 심정을 뒤로하고, 인의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실패. 로봇일까? 싶은 마음에서 아, 로봇이구나. 수긍하고 나서 한 번 더 안간힘을 써봤지만 무리였다.
이때쯤 되니 인이 일어나는 건 둘째 치고 어디에서 자야 될지 걱정되었다.
새 침대를 주문할 때까지 인을 침대에 눕히고 소파에선 내가 잘 생각이었으나…… 일단 인이 나를 놔줘야 했다.
문득 인의 같이 자냐는 말이 떠올랐다.
‘이거…… 들키면 감방 감 아닌가.’
실없이 웃은 끝에 침대에 비집고 누웠다.

짹짹짹, 하는 소리에 하품을 동반한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났다. 하아아음, 방 안을 진득하게 메우는 하품소리. 오늘은 토요일 출근 안 해도 되는 날, 그렇게 머리에 생각할 때쯤 일어나는 걸 포기하고 다시 누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을 부릅떴다.
검고 긴 머리카락, 말랑말랑한 감촉, 은은하게 감도는 좋은 냄새, 그런 미소녀가 내 품에 안긴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에, 누구?
뭐지.
이거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지?
‘…………저질렀나?’
저질렀나? 이거 저지른 건가? 저질러버린 건가! 뭐야, 뭐야, 뭔데 이거, 왜 어린애가 있는 거지? 나 뭔 짓 해버린 거지? 어, 어, 어? 어어어?
나 감방 가는 건가!?
내가 혼자서 폭주하고 있을 때 소녀는 눈을 비비며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헤……?”
내가 눈에 들어왔을 까? 소녀는 나를 한 번, 자신의 손을 하번 쳐다보더니 나를 한 번 더 쳐다본 끝에 동공을 크게 떴다.
“죄송합니다!”
응?
뭔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나와서 혼란을 부추겼다.
감방 가는 구나 생각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뜻밖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다 큰 성인 남성이 여자아이를 안고 자는 게 남자 잘못일까? 아니면 여자아이 잘못일까?
일단 여자아이가 성인 남성을 덮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시나리오가 없는 만큼 전적으로 남자 잘못일 테고, 법정 판결이 어떻게 나든, 세간의 눈은 절대 남자 편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나라도 그럴 것 같으니까.
“저, 저기, 그러니까 이게 제가 일부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무의식이랄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자, 자다보면 뭔가 잡지 않나요? 막 마음 편안해 지라고요, 네, 그러니까 그렇다고요! 아뇨,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해봤자 나도 이해 안 되는데.
아니 그보다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아니, 일단 들어봐. 내가 요즘 회사 프로젝트가 있어서 말이야, 내가 요새 야근을 좀 많이 했거든? 그래서 그러는데 이거 정말 실수니까 한 번만 봐주라 응? 요즘 먹고 살기가 너무 궁핍해서 그래, 불쌍한 사람 한 명만 구해준다고 치고, 어떻게 안 될까?”
“흐에엥, 반품하지 말아주세요.”
“나도 감방가고 싶지 않아…….”
이 상황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문제 사유는 숙면 이후 산소 부족으로 결정되었고, 판결 결과 둘은 창피함이라는 죄를 선고받았다.
침묵,
그리고 또 침묵.
침묵만이 이어지는 가운데 인은 바닥을 보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
“………….”
“저, 저기.”
“네, 넷!?”
혀 깨물었네.
눈물을 찔끔 머금는 인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보는 나는 앙증맞아서 눈 호강했지만.
“일단 밥 먹을까?”
“그, 그러죠.”
어색하게 굳어있는 인, 나도 별반 다를 거 없다고 생각해보니 머쓱해졌다.
“제가 요리할게요.”
능숙하게 앞치마를 입은 인은 머리를 묶었다.
귀엽네……
찰랑거리는 포니테일을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자, 인의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나, 나 상 차릴 테니까.
“저, 저도 요리할게요.”
상을 닦은 이후 본격적으로 반찬과 수저를 가져가려고 부엌에 가자 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부끄러움에 급격하게 돌아가는 목, 그러다 인이 실수하게 되고 접시가 쨍, 하는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인 괜찮아?”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네. 넷!”
혀 얼마나 짧은 건데 라는 엉뚱한 생각도 잠시, 인이 깨진 접시조각을 잡으려고 하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인! 맨손으로 잡지 마!!”
그리고 짱! 같은 소리가 들렸다.
“……?”
손을 뻗음과 동시에 내가 들고 있었던 컵이 떨어지고, 맥없이 쪼개졌다. 그것 외에도 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튀어 오른 인이 국 냄비를 치게 되고……
대참사가 일어났다.
흠뻑 젖은 인과 바닥에 널브러진 수많은 그릇조각들. 인은 낯빛을 짙게 깔다가 흐에엥, 하는 소리와 함께 울면서 매달리기 시작했다.
“저, 저 반품 안 할 거죠? 요리도 제대로 못하는 로봇이라면서 반품 안 할 거죠? 그렇죠? 아침에도 그렇고 요리도 제대로 못하고, 실수 덩어리에 막 민폐만 끼친다고, 그러지 않을 거죠? 네? 네!?”
조미료를 넣지 않고 간단한 식재료만 넣은 국은 말 그대로 맹물이었고, 물을 뒤집어쓴 인의 옷은 살짝 비췄다.
에로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인은 꽤 무거운 편이었다. 인간이야 신장이 180cm여도 체중은 60kg에서 65kg정도? 하지만 로봇은 그렇지 않은 모양인지 155, 153cm에 불과한 인은 자그마치 90kg씩이나 됐다.
“자, 잠깐만 인! 무거워!”
“무, 무거우면 안 되는 건가요? 저, 저도 무겁고 싶어서 무거운 게 아닌데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만들어진 건데요!! 저, 저도 몸무게는 민감한데 너무해요요요요요.”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윗옷을 붙잡고 매달리는 인에게 내가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만유인력에 따라 깔리는 것도 손 쓸 수 없는 필연이었다.
내 위에서 울며 매달리는 인은 기이어 얼굴을 파묻고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내가 아침과 달리 제정상인 이유는 인의 폭주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저, 저 아직 하루밖에 못 살았거든요. 일단 저 진한 님께서 직접 커스터 마이징한 제품이니까아아아, 저 반품 되어 버리면 재판매 안 되는데 그러면 매물로 고물상으로 넘어가버린다고요! 백만 원도 안 나온다고요!”
내가 뭔 말을 해보기도 전에 글썽거리는 인의 말이 속사포로 쏟아졌다.
“저…… 희금속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구요! 골자를 세라믹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피부를 벗겨내도 아름다운 광택을 유지할 수 있고요!! 그, 그런 저를 고작 LME구리 시세로 넘기시겠다는 건 고작 7, 70원도 안 나온다고요!? LME 구리 1톤 당 7000원이라구요! 저 구리 별로 없어요! 하다못해 금으로 파세요! 금!!”
“아뇨 이게 아니라!!!”
“반품하시지 마세요요오오오. 분쇄되고 싶지 않아!! 으아아아앙.”
옷이 젖을 정도의 엄청난 밀착도.
청초한 어제의 모습과 달리 화끈한 모습과 서비스에 간간히 유지하던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어질 것 같았다.
에로 했고.
좋은 냄새도 났고.
내 취향이고.
내가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 인의 얼굴과 마주쳤다. 검은 색 눈동자가 뺑글뺑글 돌아가는 인.
‘헉.’
퍼뜩하고 정신을 차리자 인의 눈물샘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인, 인, 인!”
“그, 그만 크아악!!”
어젯밤 결과로 미루어 힘으론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신했고, 지금 실감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가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저, 저기! 진한 님? 진한 님!”
당황한 인이 내 몸을 흔드는 게 느껴졌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 의식은 계속 흐려져만 갔다.

때는 10시 경. 아침을 먹기에도 점심을 먹기에도 애매한 시각, 인은 다소곳 무릎을 모은 채 정좌하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
“………….”
“인.”
“네.”
“오늘은 그냥 시켜먹자.”
“네…….”
우울해 보이는 인을 나는 다독여주지 않았다.
진심으로 허리가 박살날 뻔 했으니까, 조금은 반성해주었으면 한다.

2

보쌈을 대자로 하나 시킨 다음 헛기침을 했다.
“저, 저기 인, 씻고 오지 그래?”
흠뻑 젖어서 이곳저곳 비치거나 짝 달라붙은 인의 모습은, 어딘가…… 어린아이한테 있으면 안 되는 색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그랬다.
“진한 님 먼저 씻고 오세요.”
“아니 난 괜찮아. 그보다 인 먼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은 생각보다 폭탄발언을 뱉었다.
“그러면 같이 들어가면 되잖아요?”
아……
그러니까.
주님?
어린아이한테 그러면 안 되겠죠? 그렇죠?
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네에에, 네, 아! 역시 주님.
그러니까 저보고……
저보고 고자라니요!!!
큼큼.
“아까 음식 주문했잖아, 목욕 중에 오시면 여러모로 실례니까 난 됐어.”
“알겠습니다.”
인이 욕실에 들어가고 나자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 후 접시조각을 치웠다.
‘마지막은 신문지로 싸서 넣으면……’
부엌을 치운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음식이 왔다. 결제한 다음 인이 나올 것을 기다리며 상을 차리고 있자니, 인은 상상도 못한 모습으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이, 인? 잠만 무슨!? 왜 알몸이야?”
“갈아입을 옷이 없습니다.”
“아니, 잠만…… 잠만 좀 가려봐, 옷 가져올 테니까.”
“가릴 필요가 있나요?”
“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고!”
“그건 19세 미만의 청소년 기준입니다? 진한 님은 올해 27세의 건장한 남성으로 법률의 저촉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문제가 아니니까! 가려!”
나는 아무 옷이나 쥐어주고 방에 밀어 넣었다. 인은 끝까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진심 같아서 무서웠다.
이러다간 내 정신이 못 버티겠어.
손바닥으로 가린 얼굴이 화끈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옷을 입고 나온 인이었지만 나는 실수라며 이마를 붙잡았다.
품이 너무 넓은 나머지 한쪽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인은, 우윳빛 살결을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다면 벗겠습니다.”
“입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인은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에 앉았다.
“뭐해?”
“네?”
“먹어야지.”
“제가요?”
“어.”
“먼저 드셔주세요.”
“같이 먹어야지.”
“왜요?”
“………….”
“………….”
뭔가 이야기가 평행선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쇄골에 눈이 가는 것을 가리고 이마를 잡았다. 거친 한숨.
“저, 저기, 제가 또 뭔가 심기를 거슬렀나요? 정말 죄송합니다.”
안절부절 하면서도 면목 없는지 고개를 떨구는 인. 얼마나 불안했으면 옷의 밑단을 계속 늘릴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안타깝기 보다는 쇄골의 영역이 점점 늘어나는 게 배는 신경 쓰였다.
“인, 나는 딱히 혼내려거나 그런 게 아니야.”
“그, 그런가요.”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안 먹겠다는 거야? 고기 못 먹어?”
“아뇨…… 그건 새 음식이잖아요?”
“그게 왜?”
“저희가 주로 먹는 음식은 SRF나 음식물 쓰레기입니다.”
“SPF?”
“SRF, 쓰레기 고체연료요.”
“왜?”
“저희가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면 음식물 쓰레기봉투 값이 줄고, SRF는 값이 싸니까요.”
‘아…….’
“게, 게다가 주시는 것만 해도 다행이고, 에너지만 채울 수 있다면 별 상관없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면서 환경오염 문제도 해소시킬 수 있고…….”
머리가 아파왔다. 결과가 아무리 좋다지만 그렇다고 음식물 쓰레기를 먹인다는 게 말도 못할 역겨움이 느껴졌다. 어쩌면 짜증일지도.
“괜찮으니까 먹어도 돼.”
우물쭈물 하는 인을 보면서 나는 한 번 더 말했다.
“인. 괜찮아.”
간신히 한 점을 떠보지만 인은 쉽사리 넘기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그게 어떻게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참 그렇다 싶은 감정이라고 해야 하나, 심경이 복잡했다.
인과 함께 먹는 첫 식사지만 분위기는 한 없이 내려갔다.
“인, 다 먹었어?”
“네, 네.”
퍼뜩 정신을 차리는 인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살짝 바보 같기도 하고.
아니, 귀여웠다.
다른 말 말고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그럼 나갈까?”
“네? 어디요?”
“옷 사야지. 침대도 고르고, 가구고 들이고, 뭐 이것저것.”
“저, 전 이거 하나면.”
“하지만 그거 내 옷인데?”
“네? 네, 넵.”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울상을 짓는 인.
웃으면서 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난이고, 네 몸에 맞는 옷을 사야지. 안 그래?”
“으, 우으…… 심술궂으세요.”
역시 엄청난 파괴력. 일순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능청맞게 웃어준 뒤 코트를 껴입었다.
참고로 인의 옷은 드라이기로 살짝 말렸다.
차창에 달라붙어서 주변을 둘러보는 인은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감탄하고 있었다.
차 안이기 때문에 말리진 않았지만 내렸을 땐 조금 자중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게 즐거워하는데 주변 눈치 보자고 말리는 것도 조금 우스워서 고개를 저은 후 차를 세웠다.
“진한 님 여기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네요!”
“벌써부터 놀라워하긴 이를 텐데.”
회심의 웃음을 짓자 인은 내 웃음에 응수하려는 듯
“뭐, 뭐요! 두, 두고 보자구요!”
라는 말을 뱉었다.
뭐, 뭐야 뽀로통한 얼굴마저 귀엽잖아 이거.
내가 다른 의미로 감탄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수근 거렸다. 아니 수군거리기보다 한 번씩 눈길을 주고 있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다가 나는 정말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다며 손뼉을 쳤다.
“진한 님?”
“인, 생각해보니까 님 자 빼고 말해도 돼.”
“네? 하지만 고개, 아니 주인님인걸요?”
수군거림이 가속화되었다. 그보다 고객님이라고 하려고 하지 않았나.
“빼도 돼.”
“네, 진한…… 님.”
“인?”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인은 손 사례를 쳤다.
“아, 아뇨, 이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기, 기본적인 인공소녀의 말투는 정형적인 언어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거니까, 말투도 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반말이 필요하다면 언어 프로세서 툴이나 유틸리티가 필요하다고 해야 하나!! 네 물론 3세대는 자체향상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인.
“저 아직 자체향상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기능할 시간은 살지 않았는걸요……”
인의 발언은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나는 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 사회적 입지와 존엄을 위해서 가능하면 빨리 부탁해.”
“넵……”
내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본 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말하던 것도 잠시, 나는 쇼핑카트를 끌고 Newfox 1층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진한 님, 생활에 재미를 더하다! Newfox입니다. 오늘 특가할인 상품은…….”
“off.”
“음성인식이 수료되었습니다.”
내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인은 굉장하다는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게?
이 귀찮은 기능이?
신기해?
“기계가 말을 하네요?”
“너도 말하잖아.”
“흐, 흥! 어떻게 기계하고 로봇하고 비교하시나요! 너무하세요.”
기계 안에 로봇이 있는 거 아닌가?
“그럴리가요. 엄연히 다르다고요.”
생각을 읽혔어……?
큼큼.
“뭐, 많이 발전했으니까.”
“그렇다고 할게요.”
삐친 모습을 유지하는 인, 머리를 긁적이는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1층에는 화장품이 있으니까 볼 거 없고, 바로 3층으로 올라갈 거야.”
“3층에는 뭐가 있죠?”
“옷.”
“골라주시는 건가요?”
“네가 골라야 하지 않을까?”
“………….”
“뭐, 뭔데, 무슨 눈인데 그거.”
“골라주세요.”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저기…… 나 남자거든?”
“네.”
“나 여자 옷은 봐 본적이 없어.”
“네.”
“그래서 그런데, 어떻게 안 될까?”
인은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었다.
“안 돼요.”
아……
“어, 으, 응. 그래 알겠어. 뭐, 안 될 수도 있지.”
인의 단호한 거절에 고개를 끄덕이며 합리화하는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거…… 골라줬다가 망하는 패턴 그거잖아.”
“네? 뭐라고요?”
이질적인 웃음 탓에 전혀 못들은 것 같지 않지만, 못 들었다는 듯이 되묻는 인. 나는 죄인이라도 된 듯이 고개를 떨궜다.
“아뇨, 아닙니다.”
“네.”
느긋한 마음으로 갖고 어떤 옷이 있을까 둘러보기 시작했다. 인은 어떤 옷을 골라줄까, 하는 마음에 내 곁에 붙어있었다. 그게 모종의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크음.
거칠게 숨을 고른 뒤, 안목을 믿으며 브랜드 제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렴 싼 것보단 비싼 메이커가 더 잘 만들겠지, 라는 생각 때문이지만 인은 반대로 부담스러운지 옷깃을 잡아 당겼다.
“저, 저기, 저…… 그렇게 비싼 거 안 좋아하니까요.”
“그다지 안 비싼데?”
“칠만 원인데요?”
“안 비싸잖아.”
“………… 진한 님은 혹시 부자세요?”
“조금 부유한 건 맞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 이 메이커에 이 가격이면 싼 편이라고.”
“아…….”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돈 부채?”
“너무 갔어.”
시시껄렁한 웃음을 짓고 옷보기를 계속한 결과 눈치를 본 점원이 다가왔다.
“찾으시는 옷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그런 건 딱히 없는데, 얘한테 어울리는 옷이 있을까요?”
점원은 인을 한 번 훑어보더니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움직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인의 찌릿.
“골라주길 원했는데…….”
“점원 찬스 같은 걸로?”
“그런 거 없거든요.”
“그럼 점원이 골라준 것 중에서 내가 고를 게, 어때?”
새침한 표정을 짓는 인은 그걸로 만족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런 건 어떠신가요?”
점원이 가져온 옷은 인이 넋 놓고 볼 정도로 화려한 옷이었다. 흰 색 바탕의 고풍스러운 셔츠와 갈색의 조끼, 아래는 검은 색 치마. 나야 인이 입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지만 인은 엄청 부담이라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추천해 주실 수 없나요?”
“생일 선물인가요?”
접객용 웃음인지, 아니면 호의 때문인지, 아까부터 미소를 짓는 점원은 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인을 바라보았다.
약간 째리며 볼을 부풀리는 인.
점원은 알겠다는 듯이 손뼉을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엄청 오해하신 거 같은데.
그렇게 들고 온 옷은 자그마치 세 벌.
하나 같이 예쁜 옷이었지만 세 벌 중 하나는 수수한 옷이었다. 계속 화려한 옷만 골라주었던 점원이 왜 갑자기 수수한 옷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점원은 나만 볼 수 있도록 윙크를 했다.
어라, 무슨 뜻?
우물쭈물하는 인.
아.
점원의 하해와 같은 안목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뭐 오해 좀 하시면 어떤가, 결과가 좋은데.
“인, 이 옷 한 번 입어볼래?”
내가 든 옷은 수수한 옷이었다. 아니, 멀리서 볼 땐 잘 안 보였지만 잘 보니까 스타일이 좋은 옷이었다.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인. 얼굴에 다 들어나서 그런데 너무 귀엽다.
오.
인이 시착하고 나오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점원은 마치 큰 일이도 끝낸 것처럼 이마를 닦고 있었다…… 저기, 땀은 나시고 닦으시는 건가요?
큼큼.
수줍어하면서 시선을 회피하는 인이 무척 귀여웠기 때문에 두 번 볼 것도 없이 카드를 꺼냈다.
“계산해 주세요.”
“네. 감사드립니다.”
“저, 저기 진한? 이거 비싸지……”
“괜찮아. 돈 많아.”
가격표라면 봤다. 상하의 합쳐서 십칠만 몇 천 원 정도, 낮은 가격은 아니지만 그걸 뛰어넘는 구매 의향이 있었다.
“가자.”
“으, 응.”
인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손을 잡고 발을 재촉했다.
“다른 것도 사야하니까, 빨리 돌아보자.”
기진맥진 한 채 헉헉대는 인.
“왠지 진한과 함께 있으면 제 금전감각이 이상해질 것 같아요.”
“너도 금전감각이 있어?”
“만 원에 쩔쩔 매는 그런 거랄까요.”
“그런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걸.”
“부자……”
“너만 해도 엄청난데 이제 와서 만 원이 대수야.”
“……핵심을 찌르시네요.”
쪼르륵, 조심스럽게 아이스티를 마시는 인은 연체동물 마냥 흐느적거렸다.
‘RPG에 나오는 슬라임 같네.’
“진한, 무슨 생각해요?”
“어? 아니, 한 4시 쯤 되니까 기왕 나온 거 식사까지 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뭐하면 좋을까 싶어서.”
“저, 그, 그럼 제게 생각이 있는데요……”
우물쭈물 입을 여는 인, 의외라는 눈치로 인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인이 먼저 권유하다니.”
“저, 저도 하고 싶은 것쯤은, 그, 그보다 옷하고 이렇게 같이 나와 주신 거 감사합니다. 아까 전에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아까 전에 하려던 말은 그거였나.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팝콘이나 그런 것 좀 살까?”
“팝콘이요?”
“옥수수 튀긴 거.”
“그거 정말 먹을 수 있나요?”
“뭔 생각을 한 건데…… 뭐, 사와 보면 알겠지.”
영화 티켓 두 장과 팝콘, 콜라 등을 사오자 인은 신기한 듯이 팝콘을 바라보았다.
“이게 옥수수를 튀긴 건가요?”
“그런데.”
“뭔가 튀김옷이 있고 그런 건 줄 알았는데요.”
의도치 않게 상상해버리자 비위가 상했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건 팔지 않을 거야.”
“다행이네요.”
싱긋 웃는 인은 역시 귀엽다……
“아 여기네요.”
좌석에 먼저 앉은 인은 하암, 하고 하품을 했다.
“졸려?”
“네, 네? 아, 아뇨. 제가 오자고 했는걸요!”
“아니, 그건 괜찮은데 너무 많이 돌아다닌 게 아닌가 싶어서.”
“괜찮아요!”
억지로 기운 내는 건가.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말해도 되는데.
화려한 오토바이 소리를 시작으로 영화가 틀어졌다. 부아아앙―― 하단에는 미국 켈리포니아 주, 라는 말이 써져있었다. 정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혼자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사람과, 가족끼리 같이 온 듯 오붓한 모녀와, 친구인 듯 재잘거리며 영화를 보는 또래들. 그 중에는 연인인 듯 손을 잡는 이들도 있었으며 뒷좌석에서 핸드폰을 만지는 아저씨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영화를 보고 있는 인.
줄어들 기색도 없는 팝콘을 으적으적 씹으며 콜라를 마셨다.
목젖을 타고 시원하게 흘러들어가는 콜라, 탄산 때문에 따끔따끔한 것도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콜라를 즐기는 법은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나 볼 것이지 웬 콜라 품평이냐고 하면 또 모르겠는데, 이 영화 정말 재미없다.
차라리 삼류 콩트를 보는 게 배는 나을 정도로 느릿느릿한 전개에 이도저도 아닌 배역들, 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는 히로인, 암을 절찬리 생산 중인 주인공.
답답하기 그지없지.
화려한 특수효과가 없는 멜로영화라서 그런지 지루함은 더욱 가중되는 것 같았다.
애매모호하게 끝난 주인공과 히로인의 키스.
삐딱한 시선으로 영화를 관람하다 보니 배역 이름들이 나왔다. 그에 맞춰 전등이 켜지고 어두웠던 극장이 환해졌다.
네티즌 평점에 어울리지 않는 돈 내고 보기 아까운 영화.
내가 영화를 확정짓고 나자 인은 후련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재미있었어?”
“네!!”
……정말?
주변을 훑어보니 대체로 여성이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영화가 어디에서, 어떤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잠시 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주 나와서 볼까?”
“정말요?”
“정 나올 시간이 없으면 CD라도 사서 보자.”
“우, 우와.”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듯이 눈을 빛내는 인. 못 말린다며 웃음을 지고나자 시계는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넵!”
허겁지겁 배를 채운 인을 차에 태웠을 때, 인은 첫날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룸미러로 살짝 비치는 인의 행복한 표정을 운전 중 몇 번이고 흘겨 본 후, 인을 안고 들어왔다.

3

“오빠, 오빠.”
드넓은 풀숲 한 가운데에서 한 소녀는 머리 한 둘 정도 더 커 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왜?”
“벌레.”
배시시 웃는 웃음과 달리 소녀가 내민 것은 한 마리의 벌레였다. 벌레는 놓아달라는 듯이 긴 다리를 꼼지락거리면서 버둥거리고 있었는데, 무척 징그러웠다.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을 찡그리면서 소녀에게 외쳤다.
“야, 그거 놔줘!”
“으응? 왜?”
“벌레가 아파하잖아!”
“벌레 아파해?”
“어! 그러니까 놔줘!”
소년은 질색하면서도 소녀의 곁에서 멀어지지 않았는데 벌레에 움츠러드는 것도 잠시 소녀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년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어딘가 아쉬운지 벌레를 놓지 않았다. 소년은 그것에 맞춰 다른 남자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야, 류한. 소아 좀 말려봐.”
“에, 싫은데.”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쉰 소년은 어떻게 하면 소녀가 납득할까 궁리하다가 번뜩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번에 엄마한테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 들었지?”
“응!”
“배짱이는 흥청망청 놀다가 겨울이 되니까 어떻게 됐어?”
“배고팠어.”
“그래, 그런데 소아가 그 벌레를 계속 놔주지 않으면 벌레는 겨울을 위한 음식을 모으지 못해서 겨울에 배고플 거야, 소아는 벌레가 배고파도 괜찮아?”
“으응.”
고개를 돌려가며 부정하는 소아.
“그러면 그 벌레 놔줄 수 있어?”
“응!”
소아의 손을 떠난 벌레는 부리나케 도망쳤고, 풀숲으로 숨어들고 나서야 숨을 돌린 소년은 멋쩍게 웃으며 류한과 소아를 인솔해갔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소아는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결이 매우 고와서 가족 내외로 칭찬이 자자했다. 그것 외에도 작고 아담한 신장에 좁은 어깨, 흰 색에 비견될 정도로 매끈하고 고운 피부, 야무지게 여물어 있는 입술과 맵시 있는 콧대는 그 당시 소아의 미모를 더욱 돋보여주게 했다.
하지만 뚜렷한 모습이 얼마나 갔을까, 점점 흐릿해지는 소아의 모습에 나는 손을 뻗으며 애타게 불렀다.
“소아.”
그 말을 기점으로 잠에서 깼다.
게슴츠레한 눈, 헝클어진 머리, 결코 좋다곤 못 할 모습으로 나는 이마를 잡았다.
‘뒤숭숭하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좋은 냄새가 번졌다.
냄새에 이끌리듯 부엌으로 향하니 인이 앞치마를 입고 싱그럽게 반겨주었다.
“진한, 일어나셨어요? 금방 되니까 잠시만 식탁에 앉아 계실 수 있나요?”
별 말 없이 식탁에 앉아서 인을 쳐다보았다.
해맑고 쾌활한 행동거지와 숨김없는 미소, 아담한 입가와 뚜렷한 이목구비, 언뜻 분이 묻어날 것 같은 순백의 피부에 무엇보다 고운 흑발.
귓가를 쓸어내리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는 인은, 순진했으되 조숙했다.
내 앞에 하나하나 쌓여가는 놓여가는 반찬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갓 한 음식과 정성이 들어간 듯, 고르게 썬 감자와 무들.
나는 고기조림을 한 숟갈 푸기 전에 인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알아챈 인은,
환하고, 덧없이, 그리고 순수하게.
무엇보다 눈처럼.
화사하게.
나를 보면서 슬그머니 웃어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LP-blue사에서 만들어진 최신 인공소녀, 인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공장에 있었던 제품이죠.
천천히 소파에 몸을 뉘이고 천장을 올려보았다. 켜지지 않은 전등, 발코니로부터 들어오는 햇빛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그윽한 적막함, 거기에 녹아있는 현대인들의 삶까지.
꼭 집어서 뭘 해야 한다,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막연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진한이 출근하자마자 집이 황량해 보인다니, 저도 어지간히 진한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진한을 생각하자 엊그제가 되살아났다.
대형마트에서 찬거리, 화장품, 가구, 옷 등을 둘러보고, 간단한 카페에서 조금 쉰 다음에 영화까지.
진한은 뚱한 표정으로 봤지만 나는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특히 마지막 키스신 이후 열린 결말로 해놓은 점이 여러 가지 상상을 자극해서. 영화를 보면서도, 보고나서도 즐길 요소가 되었다.
비극적인 결말은 비극적인 결말대로 여운이 남았고,
행복한 결말이면 행복한 결말대로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점이 좋았다.
클리셰라고 한편으로 ‘지겹다’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헤피엔딩을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지겨운 것을 이겨왔으니까.
꺼진 TV 모니터로부터 얼굴이 비췄다.
약간 맹하고 노곤한 표정, 진한이 그게 뭐냐며 살포시 웃어준 후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을 것 같은 표정, 가볍게 양 볼을 때리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마땅히 일이 없다고 해도 눌러 붙는 건 사양이다.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걸고, 고기를 버무리고, 국을 해놓고, 거실을 청소한 뒤 방 청소까지 하자.
그리고 돌아온 진한은 맞이하자.
분명 나를 칭찬해 주겠지.
하품과 함께 그 큰 손으로 머리를 헝클여놓을 거야.
그럼 나는 헝클여놓은 것을 다시 정돈하면서 ‘잘 다녀오셨어요.’를 말하는 거고.
그러면 내일이 또 시작되겠지.
방청소를 하다 문득 책장 한 구석에 어지럽게 쌓인 책들을 보았다.
하나 같이 손때가 타고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는 두꺼운 책.
진한은 평소에 무슨 책을 볼까 하는 마음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툭.
책장 사이에 껴진 사진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무엇 하나 말을 잇지 못한 채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작은 체구, 약간 큰 눈동자.
그리고 옆에 있는 소년은……
진한.
내가 없었던 옛적에, 이미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소녀가 사진에 찍혀 있었다.

“인성분이 부족해에에에에.”
책상에 엎드려서 연신 자판을 두들긴 진한은 문서 출력본을 확인해가며 다시 자판을 두들겼다.
빈대떡 마냥 늘어졌어도 일을 놀리지 않고 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그른)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힘들었는지 마지막엔 머리까지 박아놓고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옆에선 여상사가 안쓰럽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 직장에서 뭐하냐.”
“인성분이 부족합니다. 조퇴 가능하나요?”
“될 거라고 생각 하냐.”
귀를 꼬집힌 진한은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로 여상사를 보았다. 올해 4년차가 되는 선배로 이름은 이미라, 통칭 미라 선배라고 불리는 상사는 올해 삼십 세. 노처녀이다.
“뭔 표정이야 그거.”
“저도 2년차 직원인데 휴가도 마음대로 못 냅니까.”
“반대로 2년차 직원이니까 인턴한테 조금 선배다운 모습을 보여주실까?”
입가가 귀에 걸린 여상사는 귀신처럼 웃고 있었다.
그게 무서운 진한은 더 이상 대들기를 포기하고 출력본으로 고개를 돌렸다. 볼이 약간 부풀어진 것을 보니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상사는 토라진 모습을 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다가 한의 머리를 툭 쳤다.
“왜요!?”
역시 토라진 목소리.
“지금 11시 52분이거든, 10분 정도 빨리 식사하러 나가도 괜찮겠지.”
엄지손가락으로 출구를 가리킨 미라는 진한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며 거듭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네?”
입에 돈가스를 물은 진한은 미라에게 되물었다.
“인 있잖아, 인, 네 인공소녀.”
“네? 그게 왜요?”
“야, 너어어어.”
째려보는 선배,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운 모습이 있었다.
그래, 나이에 맞지 않게. 물론 입 밖에 내면 죽는다.
물리적으로.
“아, 네네, 넵, 인공소녀 말하는 거죠.”
“어.”
어흠, 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팔짱을 끼는 미라 선배는 살짝 토라졌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인공소녀 사신다고 했었나요?”
“그러려고 하는데 절차도 복잡하고 그, 뭐였더라.”
“커스터 마이징.”
“그래, 커스터 마이징.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저번에 인공소녀에 대한 모든 것, 기초 추천해드렸잖아요.”
“거기 안에 없던데?”
진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돈 추가해서 맞춤으로 만드시려는 거군요.”
“응.”
“그러면 이미지 좀 찾아서 어느 정도 구상한 다음에, 전문 일러스트레이터한테 구상도 그려달라고 하면 알아서 몇 장 그려주거든요. 구상도 가져다가 CAD로 만들면 그걸로 3D프린트 하면 됩니다. 그러면 피규어 같은 모양이 나오는데 그거 들고 업자한테 가서 상담 받으면 그쪽에서 어쩌고저쩌고 말해줄 겁니다.”
“복잡해.”
“그거 쉬운 편인데요, 관공서 가서 취득신고 하고 절차 밟고 하면 더 귀찮아요.”
“토지 취득신고 같은 거?”
“조금 다른데, 뭐 일단 비슷하긴 하죠.” 진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 뭔가 아닌 듯해서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보니까 많이 다르네요. 인공소녀 기본법에 기본 규격과 표준이 명시되어 있거든요, 커스터 마이징해도 일단 그거 맞춰야 하니까 CAD로 굽기 전에 법률 참고 좀 해야 해요.”
“으에에에.”
“어려우시다면 정부에서 이만 원인가 삼만 원에 배포하는 인공소녀 책이 있거든요? 아마 이름이…… 인공소녀 특별법, 기본법, 관리법, 이거 세 개일 겁니다. 그거 사서 좀 보세요.”
“아 잠깐 기다려봐.”
수첩을 꺼내서 적기 시작하는 미라 선배는 쓰다가 잊어먹었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러니까, 인공소녀 특별법, 기본법, 관리법, 인공소녀에 대한 모든 것 기초, 입문, 중급, 고급편 정도? 일단 그거부터 보세요.”
“그거 전부 두꺼워?”
“네, 이만 원쯤 하다보니까 한 권당 삼백 쪽에서 사백 쪽 정도 되던데요.”
“정말 인공소녀 팔아먹으려는 거 맞아?”
“원래 군용기술이었으니까 별 수 없어요.”
“산 사람들은 다 이런 과정 거쳤어?”
진한은 돈가스를 으적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전문 위탁업체가 따로 있어요. 맡기면 알아서 다 해주긴 하는데, 괜히 구실 붙이면서 돈 더 달라고 하고 건성건성 해서 그다지 추천 안 드립니다. 그리고 법률은 숙지 안 해두면 나중에 후폭풍으로 밀려오니까 솔직히 법률 공부는 해야 합니다.”
“넌 했어?”
기가 죽은 미라 선배는 한숨을 내쉬며 진한에게 물었다.
“저 3세대 당첨되고 나서 거의 1년간 공부만 했다니까요. 아, 그거 어려우면 산업대도 있어요.”
“인공소녀로 돈 벌어 먹으려는 것도 아닌데 산업대를 왜 가냐…….”
“진짜 인공소녀로 돈 벌려면 공법인 필요하니까 관두세요. 산업대 가라는 건 그쪽이 법률 설명 잘해서 그래요, 어차피 산업대 싸기도 하고 취득 해놓으면 여러모로 또 편한 거 있으니까 그렇고, 정 시간 아깝다 그러면 법률 쪽만 이해하고 관두면 되고요.”
“하아…… 나 공부 도와줄 거지?”
“밥값 내주세요.”
“그래…….”
“그럼 여기 우동 추가요!”
“야!”
실실 웃으며 우동까지 맛있게 먹은 진한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서 아직 먹고 있는 미라 선배를 보았다.
“그런데 인공소녀를 왜 사시려는 거예요? 컴퓨터도 다루기 까다로워 하셨으면서.”
“그게…… 저번에 네가 인공소녀 보여준 거 있잖아.”
“천사죠.”
“어.”
의견의 일치에서 진한과 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인공소녀와 살아본 소감은?”
“좋더라고요.”
“구체적으로.”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물어보는 미라. 진한은 직장에서는 정말 믿음직스러운 선배인데 밖에만 나오면 환상이 깨진다고 투덜거린 후 얼굴을 긁적였다.
“솔직히 생각보다는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하나, 조금 뒤죽박죽이랄까?”
“싸웠어?”
“아뇨, 싸운 건 아닌데, 처음 켰을 때부터 갑자기…… 진성S인가? 뭔가 하는 성격유형을 선택하라고 하지 않나, 설명서에는 분명 ‘모든 음식을 섭취할 수 있음’이라고 되어있는데 알고 보니까 살짝 어폐도 있었고.”
“무슨 어폐?”
“그게 모든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게 집에서 못 먹는 걸 줘도 된다. 그런 의미로 해석되더라고요.”
뭔 말인지 모르겠다는 미라 선배에게 진한은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새 음식이 아닌, 음식물 쓰레기를 주면 음식물 쓰레기봉투 값을 아낄 수 있다. 이거 직접 들었는데 조금 짜증나지 않나요?”
미라는 진한을 노려봤다.
“전 안 주죠. 뭐라고 줘요. 그냥 일이 천 원 더 내고 말지, 미각도 있는 애한테 음식물 쓰레기를…… 양심에 찔려서 못 주겠어요.”
“미각? 미각이 있어?”
“있던데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3세대는 2세대하고 다르더라고요.”
“미국에서 뭘 좀 하시는 아버지는 좀 다른가봐.”
진한은 씩 웃는 미라를 보고 못 말린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인공소녀 필요하냐고 전화 왔을 땐 조금 놀랐죠. 어쨌든 미라 선배가 생각하는 그거하곤 조금 다를 거예요. 힘도 엄청 쌔고, 무겁기도 하고, 그리고 뭣보다 정말 인간 같아요.”
“무슨 뜻?”
“감정을 잘 모방했다고 해야 하나? 저희야 침울할 때도 있고 뭣도 있고 하지만 인공소녀는 그런 거 없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행동하는 거하고 똑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그러더라고요.”
“진짜?”
“네. 왠지…….”
진한은 말을 멈추고 텅 비어버린 접시를 보았다.
뭔가 공허하다는 듯이.
“죄책감?”
미라는 궁금한지 입을 열었다가 사색에 잠긴 진한을 보며 포기했다.

“인, 나 왔어.”
“진한, 늦으셨네요.”
“어, 이번 주는 계속 늦을 거 같아. 아마 다음 주 수요일 정도는 돼야 할 거 같은데…… 밥 해놨어?”
“네.”
“너는?”
“네?”
“먹었어?”
인은 우물쭈물 거리면서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아, 아뇨, 저…… 그게 오시면 같이 먹으려고 해서.”
“이런…… 배고프지.”
“아뇨. 저야 하루 정도 안 먹는다고 해도 문제없습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야. 너만 이라도…….”
내리깐 시선, 어딘가 어두운 낯빛, 긴장된 듯 수축한 근육과 약간 거친 숨소리. 기분은 물론이거니와 몸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같이 먹을까?”
“네!? 진한은 먹고 오신 거 아닌가요?”
“그래도 했으니 맛만이라도 보려고.”
어두운 낯빛에 생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식은 거 조금만 데울게요.”
“그래.”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퍼졌다.
바삭 튀긴 생선과 한 입 크기의 떡갈비, 반찬가계에서 사온 오징어포도 뭔가 특색을 가한 듯 전보다 맛스럽게 변해있었다.
떡갈비를 집에서 만들 수 있는 걸까? 생각하고 있을 때 인은 밥공기에 밥을 퍼서 식탁에 내려놓은 뒤 앉으라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식탁에 앉자 입에 군침이 돌았다. 저녁에 먹은 보리밥정식에 꿇리질 않을 상다리 휘어질 반찬과 하나하나 정성이 들어간 인스턴트 없는 수제 요리. 남 같지 않은 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정성만 해도 이미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먹자.”
주저 없이 떡갈비를 집었다. 젓가락에 감도는 기름기, 입 안에서 확 하고 퍼지는 육즙과 달콤함에 감탄사를 내질렀다.
‘도시락 싸달라고 할까……’
딴에 있어선 귀찮을 것 같지만 인이라면 기뻐할 것 같았다.
“맛있는걸.”
쑥스러워 하는 인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몇 개 집어먹은 것도 잠시, 정식을 먹어서인지 젓가락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거 내일 먹게 도시락 싸줄 수 있어?”
“네, 네!”
상을 치우고 할 일 없이 TV를 틀었다.
알 것 없는 홈쇼핑이 나와서 채널을 넘겼다. 워낙 뒤죽박죽 넘기다 보니 예능 프로그램이 틀어졌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나로서는 채널을 돌리려고 했지만 인의 표정을 보고 멈춰 섰다.
TV에선 온갖 예능인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보고 있는 프로그램을 바꾸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서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이번 기회에 나도 예능 프로그램 좀 봐볼까.
진행자는 흥을 고조시키려는 지 온갖 멘트를 던져가며 웃기고 디스하고, 그런 과정을 반복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배를 잡고 웃는 이들을 보자니 어딘가 안쓰럽다고 해야 되나, 보기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끝나버린 예능 프로그램을 무척 아쉬워하고 있었다.
‘저런 게 재미있는 걸까.’
시사, 평론, 논평, 뉴스가 아닌 나머지 프로그램은 결국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외엔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가지치기 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아닌 남이 재밌는 걸 가지고 본인이 재미있었던 것처럼 느끼는 것은, 솔직히 시간 낭비다.
‘하지만 그걸 남한테 강요할 필요는 없지.’
“재미있으셨나요? 전 도중에 너무 열중해서 본 것 같지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뜸을 한 번 들인 이후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이 프로 재미있으면 나중에 시간 맞춰서 볼까?”
“정말 그래도 되나요?”
“상관없어.”
두 손을 모으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인.
이런 걸로 근심이 사라진다면야 못할 것도 없다.
“인, 오늘 뭔가 힘든 일 있어?”
“네? 아…… 오늘따라 갑자기 진한이 늦어서 나가봐야 하나 걱정했던 것뿐이에요.”
직감적으로 아니라고 소리쳤다.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럼 뭐라도 하고 싶은 거 있어?”
“아…… 그럼 힘드시지 않을까요?”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술 한 잔 먹고 잘 시간을 뺀다면 그리 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조금 일찍 자면 될 일이다.
“괜찮아, 물론 밖에 나간다든가 그런 일은 조금 힘들겠지만 말이야.”
“그러면 앨범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애, 앨범?”
“네.”
“무, 물론 안 될 건 없지만 왜?”
“궁금해서요.”
“그, 그래.”
케케묵은 장롱에서 앨범을 꺼내들었다. MT에 찍은 사진이며 동아리나 친구들과 여행갈 때 같이 찍은 사진들, 이제 와서 보면 정말 구리고 구린 기억들이 다수 있었다. 이걸 세간에선 분명 추억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본인에게는 흑역사밖에 안 되지만.
인이 조신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한 사진을 가리켰다.
“이건 진한이에요?”
“저, 저기 이건 말이지. 그러니까 별 수 없었다고 해야 하나 불가항력이라고 해야 하나, 음…… 이게 바로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폐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음.”
“진한, 여장하셨군요!”
열띤 웃음을 짓고 배시시 웃는 인은,
귀여웠다. 무지 귀여웠다. 중요하니 한 번 더 말하자면,
무지 무지 무지 귀엽다.
천사다. 레알 마지 진심 정말 천사.
약간 소악마 끼도 보이는 것 같아서 사랑합니다.
큼큼.
“불가항력이야.”
“그래도 꽤 잘 된 걸요. 이거…… 아이섀도하고 붙이는 눈썹인가요, 그렇다면 가슴은 패드? 본격적인데요?”
“그만…… 인 그만 해줘.”
“우와와…… 미니스커트. 야해요, 진한, 야해요.”
앨범을 낚아채서 접었다.
당혹스러워 하는 인이지만 이내 내 표정을 보고 싱그럽게 웃었다.
“진한, 딱 한 장만 더 봐도 되나요? 뭐라고 안 할 테니까요.”
한 톤 낮아진 목소리와 편안한 듯 웃어 보이지만 어딘가 강경한 행동, 하나라며 올린 손가락이 어떻게 거절할 수 없게 막아섰다.
“저, 정말이지?”
“네.”
눈이 웃지 않은 웃음. 나는 마지못해 앨범을 준 후에 인이 무슨 사진을 찾는지 지켜보았다.
인은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앨범을 덮었다.
“결국 무슨 사진을 찾은 건데?”
“아뇨, 진한 어릴 때 사진이 궁금해서요.”
눈을 예리하게 뜨고 인을 바라보았다.
“내 어릴 때 사진 봐서 뭐하게.”
“그게…… 왠지 진한이라면 천방지축 꼬맹이 아닐까 궁금해서요.”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웃음 마냥 지어준 인은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며 앨범을 내밀었다.
나는 앨범을 장롱 속에 다시 넣어놓고 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4

“고민 있냐?”
등 뒤에서 차가운 게 닿았다.
“미라 선배, 차갑거든요.”
“마시라고 준거야.”
“저 냉커피 안 마시는 데.”
“그냥 먹어.”
“네에, 뭐.”
목을 타고 시원한 커피가 넘어갔다. 마음에 맺힌 응어리도 커피처럼 시원하게 넘어가줬으면 더없이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았다.
“뭘 그리 한 숨 쉬고 있냐.”
“역시 미라 선배, 저한테 엄청난 관심.”
“신경 꺼, 알아챈 건 내가 아니라 네 후배.”
미라 선배는 엄지손가락으로 눈치보고 있는 남성을 가리켰다.
“이제 감독 끝났을 텐데요.”
“그래, 이제는 반 년차 정사원이기도 하지.”
“그래서요?”
“그래서요? 뭐가 그래서긴 그래서야, 네 후배가 너 한숨 푹푹 쉬는 게 영 거슬리는지 주의 좀 달라는 거지.”
으르렁거리는 선배와 달리 뒤에선 손 사례 치는 후배가 보였다.
‘선배, 관계 브레이커.’
“조심할게요.”
“그러지 말고 한 숨 돌리고 와, 어차피 또 인공소녀지? 들어줄 테니까.”
“그냥 선배가 궁금한 거 아닙니까?”
한 대 맞았다.
이 회사가 정말 좋은 게 사내에 산책할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꽤 크다.
담뱃갑을 꺼내서 불을 붙였다.
“담배도 피웠어?”
“다들 군대 가서 배워오죠. 최근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요.”
“뭐 좋다고 다시 피냐. 끊어라 그냥.”
“아뇨…… 아니, 네 뭐, 끊어야죠. 인도 있는데.”
“뭔데.”
“다다음 주가 황금연휴라서 좋긴 한데, 설날이 때문에 본가 한 번 가봐야 돼서.”
“좋은 거 아니야?”
“딱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게, 저 아직 본가는 조금 거북스러워서, 그것보다 선배, 여자애가 갑자기 풀 죽어있으면 어떻게 하죠?”
“뭔 여자애냐, 그냥 인이라고 하지.”
………….
“선배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회사 안에서 보는 게 엄청 터프합니다.”
“나 디스 하냐?”
“아뇨, 사랑한다고요.”
“뒤진다.”
결과 똑같지 않나? 피식 웃으며 담배를 문댄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
쓰레기통을 타고 미약한 연기가 타고 올라왔다.
“그래서 인이 갑자기 이상한데, 뭐 방법 없을까요?”
“맛있는 건 사줘봤어? 옷이나, 물건이나 그런 거.”
“옷은…… 저번에 사주고 매달 용돈 주고 있어요. 맛있는 거라고 해도 인이 밖에서 먹는 것보다 더 요리 잘해서.”
“자기가 만든 거하고 남이 해주는 건 다르지.”
“네…… 다른 건 없나요?”
“네가 뭐 신경 거슬리게 했다거나.”
“집히는 거 없는데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여자들은 사소한 거에 잘 삐치니까.”
“선배 말하니까 좀…….”
“너 진짜 오늘 좀 맞고 싶은 거 아니야? 때려줄까? 앙?”

진한이 회사에 나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습니다.
그래서 심심합니다.
약간 지겹기도 하고요.
흰 색 침대에서 뭉그적거렸다.
폭신합니다. 기분 좋네요. 인간은 모두 이런 곳에서 자는 걸까요? 정말 부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공장에서 생활할 때는 침대는 고사하고 천 조각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옷자락을 잡아보았다. 복슬복슬한 부드러운 면직물이 만져졌다.
‘…………부드럽네요.’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저희 로봇들은 인간이 누려야 것의 태반을 누리면 안 돼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습니다. 침대에서 잤다간 전자기발생 때문에 부품이 고장 난다든가 하는 거요. 하지만 로봇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건 거의 누릴 수 있었습니다. SRF같은 쓰레기 고체연료가 아닌 밥과 국을 먹을 수 있었고, 침대에서 잘 수 있고, TV를 보거나 책을 보는 등의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로봇이 할 수 없는 것은 하등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저희의 취급은 왜 그러는 걸까요.
쓰레기 연료를 먹고, 전원버튼이 수시로 내려가고, 제품 검사를 위해 옷도 못 입고, 전등이라곤 없는 어둡고 차가운 밀실에 아무렇게나 던져집니다.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이렇게 생활하는 구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진한의 집에 왔을 때 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죠.
제가 아는 세계와 판연히 다른 세계에서 사는 진한을 매우 높은 자산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저마다 집에서 살고 세끼를 챙겨 먹었습니다. 저는 한 끼를 먹었는데 말이죠.
가장 놀란 것은 진한이 친절했다는 점입니다.
공장 사람들은 저를 물건으로 다뤘거든요, 그에 반해 진한은 저를 마치 사람처럼 대해주었습니다. 그게 가장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로봇의 처지를 투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울적한 마음에 이것저것 뱉어내는 것뿐이죠.
하지만 그렇잖아요.
저희가 인간에게 있어서 얼마나 하찮고 볼품없는 존재인지,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지, 정말, 정말 믿고 싶지도, 알고 싶지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걸 왜 궁금했을까 싶지만!
저희는 더치와이프네, 맘에 드는 피규어네 하는,
장난감이었습니다.
그게 Nove의 인공소녀 검색 결과 하단에 써진 덧말입니다.
알고 나니 웃음도 터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게 말이 안 나왔으니까요.
사실은 망상보다 잔혹했습니다. 어느 것보다 현실성 있게 다가왔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제가 진한에게 팔렸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받고, 얼마나 보답 받은 건지 상상이 안갑니다.
온기에 먼저 보답받기 전에 현실을 마주했다면 좌절해서 못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침대 시트에 볼을 비볐다. 온기가 살짝 묻어나왔다.
그러다 침대 시트를 억세게 쥐었다.
“진한……”
얼굴을 파묻는 것도 잠시, 몸을 뒤집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유야 뭐든 좋았다. 대충 에둘러서 천장을 보고 싶은 기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저는, 아니 저희 인공소녀는 누군가가 저술해놓거나 그려놓은 것의 2차 창작물에 불과합니다. 시중에 떠도는 이미지를 참고해서, 혹은 상상해서, 푹푹 찍어낼 뿐인 단가 높은 인형.
버려지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렇죠, 로봇에게 존재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개만도 못하군요. 개는 사면 이름이라도 제대로 붙여줍니다. 다른 누구로 착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누구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2차 창작물에 불과한 저희는 아닙니다. 저희에게 존재란 없습니다. 권리도, 존엄도, 자유도, 뭣도 없으면서, 이름조차도 저희에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존재조차도, 로봇이라는 이유로, 기계라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왜 입니까.
이렇게, 이렇게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존재조차 인정해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저희의 이름은 시중에 떠도는 2차 창작물의 이름으로 충분하다는 겁니까?
저희는 영원히 저희들의 이름으로 불려줄 자격조차 없는 겁니까? 고객님의 의해 누군가로 덧씌워지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대체되면 그만인……
그런 상품입니까.
그런 상품이었습니까.
“진한……”
시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한.”
두 글자가 제 머릿속에, 아니 가슴속에 확실히 각인됩니다.
저는 진한과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겐 그 시간이 전부였고, 그것이 저를 이루는 모두였기 때문에! 저는 진한과 있는 시간이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진한.”
저는 당신에게 무엇으로 대체되는 건가요?
인이 아닌 저는 무엇인가요?
저는 사진 속의 소녀입니까?
소녀의 대신입니까?
그런 이유인가요.
제가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살아가고,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그런 모두가.
진한에게 있어선 전부 그 소녀를 위한 것이었군요.
원망할 겁니다, 원망할 거예요, 말도 안 돼요,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무엇에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죠? 말없이 존재를 의탁해가며 살아가야 하나요?
진한 없이 살고자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네요. 저는 진한의 말 한 마디에 폐기처분 되고……
그 로봇들처럼 녹여지는 건가요.
웃기지도 않아요! 이런 농담 따위! 웃기지도 않는다고요.
………………
하지만 진한.
저는 뭘 해도 진한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진한이 짓는 웃음이 좋아서, 우악스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아서, 어리숙함이 좋아서, 진한의, 진한의 그 모든 게 전부 좋아져버려서!! 미워하려고! 원망하려고! 그렇게 해봤자 안 된다고요!!
진한, 저는 인으로 있길 원해요.
저는, 저는,
너무 울고 싶어요.

그럴듯한 로맨틱 영화를 보고 인을 바라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감정의 기복 없이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혹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염려한 것이지만, 인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미없었어?”
“네? 진한이 추천해준 영화인걸요. 이번 영화는 저번과 달리 긴박함과 속도감이 있어서 좋네요.”
“그,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자신이 붙었다. 확실히 막판 추격전의 스릴은 최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말없이 이어지는 사랑, 느와르 풍의 무덤덤하고 어두운 분위기도 적당히 흥취를 고조시켜줘서 보는 맛이 살았다.
인은 쓰레기통에 콜라와 팝콘을 버리고 나서 산뜻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맡겨둔 휴대폰도 가져왔고, 영화도 봤는데, 이제부터 뭐 할까요?”
“밥이라도 먹을까?”
“에이, 아직 이르잖아요.”
인은 휴대폰을 과장스럽게 꺼내보았다.
마치 그것이 기쁘다는 듯이.
“휴대폰은 어때?”
“사용법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요. 하지만 진한한테 배울 거라고 생각하니 그리 꼭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내가 가르쳐주는 게 전제냐…….”
인은 말 대신 웃음으로 화답했다.
연이어 야근이 쏟아지는 가운데, 인은 먼저 자거나, 식사하는 법 없이 내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전화가 있으면 하겠지만 자취하고 난 뒤 부터 전화는 전부 핸드폰으로 걸려 와선지 설치해두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그걸 기회 삼아 인의 기분도 풀 겸, 이렇게 한 번 돌면서 핸드폰을 구입하려고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저 휴대폰을 하나 보려고 하는데, 어디 괜찮은 기종 있나요?”
아저씨는 나를 한 번, 인을 한 번 보더니 되물어왔다.
“여동생 분이 쓰실 건가요?”
“네, 네.”
여동생이라고 말하긴 조금 묘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넘어갔다. 다행히 인도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연령이 어떻게 되시죠?”
“연령이요?”
“네, 요즘 연령에 따라서 지원되는 기종이 몇 대 있어서.”
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다가 쑥스럽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었다.
“인공소녀라서요. 명의는 일단 제 명의로 할 생각입니다.”
오. 하는 감탄사가 들려오고 아저씨는 인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인공소녀에 대한 시선은 이게 평범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정말 인간 같네요.”
“하하, 네 뭐 그렇죠. 그보다 기종을 조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말허리를 잘랐다. 아저씨도 그 정도는 이해해준 듯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면 적당히 잘 나가는 거 몇 개 추천해드리면 되나요?”
“저기?”
“아, 네, 그래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저씨의 말에도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인간 같다는 말에 인의 어깨가 흔들렸던 건 기분 탓인가.
금세 지워졌으니 알아볼 기미는 없었지만 아무튼 좋지는 않았다.
“그러면 이거, 이거 작성해주시고요.”
종이를 내민 후 뭔가 작업할 게 있다면서 열씬 마우스를 움직거리는 아저씨.
종이를 전부 적고 난 다음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네, 그럼 아가씨, 케이스는 어떤 걸로 하고 싶어?”
“네?”
“아니, 휴대폰 케이스 말이야, 휴대폰만 하면 떨어뜨렸을 때 액정 깨지거든.”
“저…….”
갑자기 내 눈치를 보는 인.
“할 때 같이 주시는 거야, 좋아하는 걸로 골라도 돼.”
내 허락 이후 인은 조심스럽게 흰 케이스를 골랐다.
흰 색을 정말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때, 아저씨는 흔쾌히 웃어주고는 몇 시간 후 다시 오라고 말하셨다.
좋으신 분이라서 순간 기분 나빴던 게 죄송스럽다고 해야 되나. 확실히 인은 일반 가정용과는 달리 감정 표현도 능숙하고 어휘력도 좋았다.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봐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기분은 안 좋겠지만.
“인,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마.”
“인?”
“네, 괜찮아요.”
인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잠시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핸드폰을 찾고, 영화를 본 뒤에 다시 집.
인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음식 할게요.”
“오랜만이니 같이 할까?”
“아뇨, 저 혼자 해도 괜찮아요.”
“아니,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다면서 인의 자리를 살짝 비워주었다. 차가운 수돗물로 손을 씻은 다음 인을 보았다.
노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포니테일로 묶으려는 지 머리끈을 입에 물고 있는 인은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붉혔다.
“저기,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 저도 부끄러운 데요.”
“어, 어? 아, 미안.”
“오늘은 애호박전 할 건데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러면 밥 좀 해주실 수 있나요?”
밑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인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없을 때도 저렇게 요리를 해주었다고 생각하니 훈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밥 준비를 마치자 인은 썰라는 듯이 애호박을 주었다. 인은 달리 해야 할 것이 있다면서 능숙한 솜씨로 계란을 깨고 거품기로 풀기 시작했다.
탁탁, 도마 위에서 맥없이 쓰러지는 애호박을 도마 한 구석으로 치워놓고 인에게 주었다. 인은 애호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더니 밀가루 옷을 입히고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넉넉히 뿌린 다음 노릇하게 부쳐냈다. 역시 그런 부분에선 나보다 뛰어난지 노릇노릇 익은 애호박전은 일전, 반찬 가게에서 사온 어떤 반찬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잘하는 걸.”
“그러는 진한이야말로 잘 써시네요.”
응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해버리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큼큼.
대충 헛기침을 하고 된장국에도 애호박을 두껍게 썰어서 넣었다. 구수하게 무르익은 향기는 한국 토종의 맛을 증명하려는 듯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솔직히 애호박전 없어도 된장국만 해도 밥 한 공기는 뚝딱하고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 배고프네.
한창 식사 중에 넌지시 물었다.
“이번 황금연휴 안에 설날이 있잖아, 그러니까 본가에 한 번 올라가 봐야 하는데, 괜찮을까?”
“………….”
“무, 물론 싫다면 나 혼자면 올라갈 수도 있어.”
인은 젓가락을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간다는 거지?”
“진한에게는 여러모로 신세지고 있으니까요, 예의라도 가봐야겠죠.”
예상치 못한 예의 발언에 가슴이 쓰라린 내가 있었다.
난 명절이 되도 잘 안 올라가는 데……
큼큼.
“그러면 밥 먹고 기차표 알아보자.”

작성자에 의해 2018.02.27 04:55 에 수정되었습니다.
작성자에 의해 2018.02.27 04:55 에 수정되었습니다.
작성자에 의해 2018.02.27 05:08 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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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제현 02/27/04:52
뭔가 자르기도 애매하고, 어디부터 잘라야 할지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자르자니 후반부 감평이 필요한데...... 싶어서!

데헷!
0 마이루비 02/27/05:30
여전히 초반부터 늘어진 설명.
밥먹고, 밥먹고, 영화보고, 일하고 흥미없는 지루한 에피소드의 일상.
애틋하거나 빠져들만한 소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번과 같이 평범한 주인공과 철없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인공소녀.
주인공 옆에 여자가 아닌 인공소녀가 있다는 걸 빼면 그냥 일상물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소설입니다.
내청코를 보면 평범한 것 같지만 조금 평범하지 않는 일상에서 작가의 유머스러운 묘사에 감탄하며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는... 그냥 테니스만 치는데 재미있습니다.
음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 고민하시지 마시고 일단 완결을 지어보세요.
감평받고 지우고 다시쓰고... 많은 작가들이 일단 쓰고 완결을 지어라는 말이 괜히나온게 아닙니당.
2 이제현 02/28/05:46
감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공모전이니 만큼 시간부족으로 내청코를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tg가로수 02/27/10:28
저도 마이루비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사실 저 부분이 가장 어렵죠 오직 작가만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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